삼포가는길 / 풀꽃세상 웹진 3호

삼포 가는 길 풀꽃세상 WEBZINE 3호 2001. 9. 3

안녕하세요.
분명 사람이 원인이었건만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남해안의 적조와 동강의 물고기 떼죽음 소식이 기상 이변의 초가을,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지난 2호에 웹진 잘 들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올린 엄살의 글에 여러 풀씨님들께서 보내주신 따뜻한 격려말씀에 어린애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람이란 허약하고도 허약해서, 꼭 그런 인사를 받아야 에너지를 얻는다는 엄살을 떨고야 말았습니다.
모든 운동은 '목적성 이타주의'에 바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풀꽃운동이 겨냥하는 목적은 회원 여러분들의 따뜻한 시선과 신뢰 외에는 따로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오늘 이곳'에서 애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결의, 그게 풀꽃운동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풀씨 여러분의 후의에 늘 감사드립니다.

오늘 드릴 장면은 문학의 영향력이 지금 같지 않았던 시절, 이농과 산업화로 급격한 사회변동이 이루어졌던 70년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국 리얼리즘소설의 백미'라 일컫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의 한 장면입니다. 백화의 연애 고백도 감동적이지만, 백화의 '여덟 차례 연애가 한 사람과의 연애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를 풀씨 여러분이 어린이 풀씨들에게 설명해 주기 곤혹스러울 것 같아서 백화가 영달의 등에 업혀 나누던 '겨울벌판(70년대)' 이야기를 옮깁니다.

삼중당 문고(1975년판) 황지우의 시편에도 나오는 <삼중당문고>는 70년대, 가난을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책 읽는 이들에게 커다란 위안이었습니다. 문고형태의 출판이 성공할 수 없는 독서시장이 현란하고 고급스러울지는 몰라도 얼마나 허구에 가득찬 거품의 시장인지 삼중당문고 독자들은 알고 있지요. 하늘이 높거나 말거나 말이 살찌거나 말거나 때없이, 늘 손에 책을 들고 사는 삶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 삼포 가는 길

아직 초저녁이 분명한데 날씨가 나빠서인지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눈은 더욱 새하얗게 돋보였고, 사위는 고요한데 나무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감옥뿐만 아니라, 세상이란 게 따지면 고해 아닌가…"
정씨는 벗어서 불가에다 쬐고 있던 잠바를 입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둡기 전에 어서 가야지"
그들은 일어났다. 아직도 불길 좋게 타고 있는 모닥불 위에 눈을 한 움큼씩 덮었다. 산천이 차차 희미하게 어두워졌다. 새들이 이리저리로 깃을 찾아 숲에 모여들고 있었다. 백화에게 물었다.
"그래 이젠 어떡할 셈요, 집에 가면?…"
백화가 대답을 않고 웃기만 헀다.
정씨가 말했다.
"시집 가야지 뭐."
"시집은 안 가요. 이제 와서 무슨 시집이에요. 조용히 틀어박혀 집의 농사나 거들지요. 동생들이 많아요."
사방이 어두워지자 그들도 얘기를 그쳤다. 어디에나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을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뒤에 처졌던 백화가 눈 덮인 길의 고랑에 빠져 버렸다. 발이라도 삐었는지 백화는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신음을 했다. 영달이가 달려들어 싫다고 뿌리치는 백화를 업었다. 백화는 영달이의 등에 업히면서 말했다.
"무겁죠?"
영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백화가 어린애처럼 가벼웠다. 등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어쩐지 가뿐한 느낌이었다. 아마 쇠약해진 탓이리라 생각하니 영달이는 어쩐지 대전에서의 옥자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화끈했다. 백화가 말했다.
"어깨가 참 넓으네요. 한 세 사람쯤 업겠어."
"댁이 근수가 모자라니 그렇다구."
그들은 일곱시쯤에 감천 읍내에 도착했다.

(황석영 作, <森浦 가는 길>, 삼중당, 1975, 154~156쪽에서)

■ 박그림 풀씨님 모시고 진행하는 <작은공부방>, 9월 8일, 6시에 열립니다

이번 <작공방> 강사는 '설악산 산양지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박그림 선생님이십니다.

산양사랑을 통해 야생동물과 함께 살 수 없도록 되어버린 우리네 환경과 황폐해진 심성을 걱정하고,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고 계신, 이론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박그림 선생님의 슬라이드 환경강좌에 많은 풀씨님들께서 같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장소는 서교동 풀꽃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