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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여름날의 실루엣 / 김애자
  글쓴이 : 풀꽃세상     날짜 : 10-07-13 17:45     조회 : 8581    

그 여름날의 실루엣

 

 김애자   

              

                                                                        

 
7월은,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태양의 열기만으로도 젊은이들은 비늘을 번쩍이며 물살을 역류하는 잉어 떼처럼 삶의 물살을 거슬려 오르고 싶어 한다. 매미들조차 변막을 한껏 열어 놓고 종일토록 귀가 따갑도록 울어 쌌는데, 하물며 혈기 방자한 이들이 어찌 한 번쯤은 역류를 감행하고 싶은 심장의 약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거나, 삶의 궤도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여름은 힘겨운 버팀의 계절이다. 생에 대한 의욕은 상실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자괴감과 소외감으로 점점 성마르고 탈진해 늘어질 때 피부에 달라붙는 후덥지근한 습기는 짜증스러움 자체다. 이런 날, 느닷없이 퍼붓는 소나기는 장쾌한 카타르시스가 아닐 수 없다. 빌딩 사이로 검은 구름이 돌격대처럼 달려오고, 번개가 번쩍 푸른 섬광을 긋는다. 천둥과 함께 장대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아스팔트 위로 뽀얀 물보라를 일으킨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건물 추녀 밑으로 뛰어들고, 거리의 행상들은 물건을 수습할 기회조차 주지 않아 상품이 노박이로 젖는다. 슬로우로 돌아가던 화면에 속도가 붙으면서 시원함과 청량한 기운이 일시에 살아난다.  

  그 어느 해 여름날 오후 다섯 시경에도 그랬다. 대전이란 도시 복판으로 소나기가 한바탕 물벼락으로 내리퍼붓고는 물러났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간간히 후렴처럼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건물로 들어가 비를 피하던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문방구 추녀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던 스물 세 살 된 아가씨도 대전역을 향해 인파속으로 끼어들었다. 얇은 블라우스에 실비가 떨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 때였다. 누군가 부르는 것 같았고, 곧바로 그녀의 작은 어깨 위로 손길이 닿았다. 흠칫 목을 움츠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낯선 청년이 얼른 손을 떼면서 몹시 당황스러워 했다.  

 

“뒤 - 뒷모습이 너무 닮아서요.”

 

 그는 돌아섰으나 청년의 시선이 등을 향해 따라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옆 골목으로 꺾어지는 모퉁이에 이르러 뒤를 돌아다보았다. 눈썹이 짙고 키가 꺽다리였던 그 청년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는 사랑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사랑이 지독한 아픔이란 것을 알지 못했고, 한번 사랑이란 덫에 걸리면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 해 볼 수 없는, 무작정 이끌려 들어가는 블랙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사랑이란 슬픔과 기쁨으로 뒤섞어 놓은 기록이라는 것을 몰랐고, 보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그런데도 소나기가 퍼붓고 간 질펀한 거리에 서 있는 한 청년에게서 그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황망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눈동자에서 꼭 7월만큼 미성숙한 사랑을, 그 미성숙함으로 잇닿을 수 없는 까닭을, 가슴 깊은 곳에 고여 있는 글썽임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날, 그녀는 목적지인 대전역으로 가지 못했고, 음악 감상실인 르네상스로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모퉁이로 꺾어들었던 것은 꺽다리의 시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였고, 뒷골목으로 에돌아 걸으면서 내내 자신의 뒷모습을 닮은 여자에게로만 신경이 쏠렸다. 당장 어디로 들어가 두 개의 거울을 놓고 자신의 뒤태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거리의 상점 윈도우 속에는 몸집이 가냘프고 생머리가 어깨선까지 찰랑거리는 자신의 옆모습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는 음악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음악사 스피커에선 대전 블루스가 해초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청년이 찾는 그 여자도 몸무게 41kg 체구로 사는 것이 두렵고 막막해서 자주 속울음을 삼키며 밥을 먹을까. 그 여자도 결핵이란 봉인된 비밀문서에 갇혀 3년 동안이나 산사의 뒷방에서 은거하다가 고향도 아닌 둘째 오빠네 집에서 무위도식으로 시간을 죽이며 지내본 적이 있을까. 사흘거리로 대전역을 향해 집을 나서 보았을까. 번번이 어디로 가야할지 행선지를 정하지 못해 기차표를 끊지도 못하고, 개찰구를 총총히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홈으로부터 멀어지는 기적소리를 쫓다가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는 절망감을 경험해 보았을까. 그 여자도 음악 감상실에서 슈베르트의「겨울 나그네」, 아니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를 신청해 놓고 정상적인 궤도에서 밀려난 단절이 서러워서, 다시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어쩌지 못해 달팽이처럼 동그랗게 몸을 움츠리고 세상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보았을까.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을 따라 나도 생의 회랑을 예순 일곱 번이니 돌아왔다. 흙으로, 바람으로, 물로 흩어지기 전에 차분하게 자신을 응시하면서 앨범이며 옷가지 같은 짐들을 정리해야 할 언저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가끔씩 막연하게 길을 나서보는 심사로 지나간 시간의 채널에 주파수를 맞추어 보곤 한다. 그러면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노 사운드처럼 영혼의 지층을 흔들어 놓는 클래식한 순간들이 떠오르는가 하면, 기억하는 순간부터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었던 일들도 적잖다. 

  오늘은 졸연히 내 작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황망하게 물러나던 그 청년이 주파수에 떴다. 그도 “사랑이란 언어가 입 속에 든 가장 뜨거운 촛불”이었다는 것을 진즉에 알았을 것이고, 삶의 우여곡절을 수도 없어 넘나들었을 것이다.  

  소나기가 기다려진다. 아니 영혼을 깨우는 소리를, 무디어진 촉수를 되살리는 소리를, 먼 곳에서 빛나는 여린 불빛처럼 아련한 그리움을, 땅바닥에서 촘촘히 피어나는 동그란 빗방울 꽃을 기다리건만, 여름 해는 눈치도 없이 사막에서 늙은 낙타처럼 굼뜬 걸음으로 하늘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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