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자리에 봄비
황규관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건 세상뿐이 아니다
요 며칠 어금니가 아파 병원에 가서
잇몸이 헐었다는 내 몸을,
말없이 바라보다 왔다
젊은 의사는 그 원인을 딱히 모르겠단 표정이니
나는 그냥 시간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대신 아이들의 등짝이 나날이 단단해지는 걸 보면
허물어지는 것만 있구나, 하는 내 적막감은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게 못된다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낙담한 친구가
술이나 함께 먹자던 유혹도 뿌리치고
차라리 보슬비 내리는 봄밤의 고요를 택했지만
희망도 절망도 실은 미망에 불과한 것
환절기만 되면 고뿔에 걸리는 내 몸도
자기 사는 집을 돈으로만 환산할 줄 아는 대한민국도
그래서 한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천변을 보기 좋게 꾸민다며 파헤치는 모습에
그만 무력해져서 침묵하는 게 아니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온 만큼 가는 것이고
냇물에서 흰뺨검둥오리가 변함없이 부리질을 하듯
허물어진 자리에 봄비는
꼭 내리는 법이기에 그럴 뿐이다
* 황규관
1993년 전태일문학상. 시집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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