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학기 학생들과 함께 빼먹지 않고 찾아간 곳이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BC)주 밴쿠버섬의 칼마나(Carmanah) 계곡이다.

이곳은 산업 활동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은 원시림으로 캐나다에서 제일 키 큰 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95m에 이르는 시카 가문비나무는 '칼마나 자이언트'로 불린다. 수령은 8백여년밖에 안 됐지만 생장이 빨라 1천년이 넘는 시더보다 훨씬 크다.

칼마나 계곡에는 이런 거대한 나무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 계곡 물이 범람하면서 넓은 공간이 생겨났고 계곡 주위의 토양이 비옥해지면서 시카 가문비나무가 생장하기에 알맞은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시카 가문비나무는 수직으로 곧게 자라 재목으로도 쓸모가 많다. 재질도 단단해 1차 세계대전 당시엔 비행기 동체를 만드는 데 쓰이기도 했다. 최근엔 촘촘한 나뭇결 덕분에 피아노 울림판이나 기타 울림통 재료로 사용된다. 시카 가문비나무가 밀집해 있는 칼마나 계곡은 1980년대 후반, 나무를 베어내려는 목재회사와 이를 저지하려는 환경단체 간의 분쟁이 극심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분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사람은 당시 약관 24세의 랜디 스톨만이었다. 그는 BC주 내의 거목들을 조사하던 중 88년 칼마나 계곡에서 거대한 시카 가문비나무들을 발견, 보호운동을 펼쳤다. 당시 칼마나 계곡은 주정부로부터 벌목권을 얻은 BC주 최대 목재회사인 맥밀란브로델사의 벌목 예정지였다.

스톨만의 거목 보호 캠페인은 지역 환경단체의 도움을 받아 90년 계곡 전체가 주립공원으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톨만은 94년 스키를 타다가 눈사태로 3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칼마나 계곡의 남쪽 등산로 끝에는 그의 자연보전 정신을 기려 '스톨만의 숲'이라고 명명한 숲이 있다. 그의 시 '바람이 남긴 것'은 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높은 산 중턱의 벌판을 걸어보라
키 큰 소나무 밑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라
흐르는 강물을 무심코 바라보라
그리고 시간일랑은 말끔히 잊어버려라 하늘 높이 솟은 전나무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어보라
흐르는 개울물과 높은 산에 서 있는 나무들을 통해
뜨거운 여름의 햇살과 매서운 겨울의 추위를 느껴보라
아름다운 대지를 잠깐 지나치는 나그네인 양
계곡을 따라 걸으며 개울가에 가벼운 발자국만 남겨라

-랜디 스톨만(1962~1994)

칼마나 계곡 숲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시카 가문비나무에는 스펀지 같이 푹신하고 두터운 이끼층이 줄기 밑부분을 감싸고 있다. 이끼층의 안쪽은 죽어 있고 바깥쪽만 살아 있다. 그 위에는 '감초 고사리'가 자란다. 뿌리가 감초 맛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숲속은 습도가 높아 착생식물이 높은 상공에 뻗어 있는 가지에도 잘 붙어서 자란다.

착생식물이 두꺼운 층을 이루고 자라는 모습은 최소한 1백50년 이상된 고목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착생식물은 별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져 그동안 하찮게 취급받았다. 그러나 최근 생물 종 다양성 보전과 관련해 그 중요성이 새로이 인식되고 있다.

빅토리아 대학의 네빌 윈체스터 교수는 칼마나 계곡의 거대한 시카 가문비나무 꼭대기까지 줄을 타고 올라가 가지를 덮은 이끼층을 조사했다. 죽은 이끼 위에 새로운 이끼들이 자라는 일이 수백년간 되풀이되면서 죽은 이끼는 90m 높이의 '공중에 떠있는 흙'이 되었다.

그는 흙으로 변한 이끼층 속에서 1만여 종의 곤충을 발견했다. 이는 캐나다에서 그동안 발견된 곤충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 중 약 5백종은 학계에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종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곤충들은 손바닥만한 이끼층 속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좁은 공간에서 보낸다는 사실이다. 그 비좁은 공간이 그들만의 우주인 셈이다. 웬체스터 교수는 칼마나 계곡의 거대한 시카 가문비나무 하나를 쓰러뜨리면 학계에 알려지지도 않은 수많은 곤충이 멸종되고 만다고 주장한다.

사뿐히 내려앉지를 못해 푹신하고 넓은 가지가 필요한 바다오리과의 새 마블브 뮬렛이나 이끼층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곤충들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이들이 생존을 의지하고 있는 거대한 시카 가문비나무와 두꺼운 이끼층만으로도 칼마나는 생명의 성소(聖所)가 되기에 충분하다.

지난 4년간 봄과 여름 학기마다 이곳을 찾았어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 이유도 칼마나 계곡만이 갖는 이같은 특별함 때문이다.

캐나다 환경교육 및 임업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