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환
변산 농민 시인 박형진이 바닷가에 산다기에 가 보니 시인은 외출중이
고, 시인을 닮은 푸짐이 꽃님이 아루 보리가, 황토 밭뚝에 일으켜 세운
흙집 문을 산새 마냥 들락거리며 놀고 있었다.
나무로 해 단 문짝을, 들 어가도 흙이고 나와도 흙인 이 집은 본래 쓰
다남은 것들만 가져와 엮은, 환경친화적 전통가옥이 분명한데, 진짜 시
인의 집은 맑은 도랑물 사시장철 철철 넘친 개울가에, 매화 가지 솔바람
댓바람 저들끼리 노닥거리는 뒤안으로, 솔갈비나 인동덩굴 자욱한 솔밭
길에 번듯하게 세워 올린 뒷간이었다.
우리말로 통시, 작은집이라고도 하는데, 지주를 세우고 널빤지로 바람
을 막고, 출입문을 격자무늬 방문으로 문고리까지 달아서,무슨 고색창연
한 방에 들어온 기분으로 엉덩이 까고 앉으면 솔바람 새어드는 소리 환
하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돌판 위에는 이원수 손동인 엮음 《창비아동문
고 한국전래동화집②》가 얹혀 있다.그 옆 자리엔 ( 주)상림비료 개업상
품으로 얻은 라이타,아마도 초파일날 태우다 남은 연꽃초 반 자루, 휴지
두루마리가 기다리고, 눈을 15도쯤 들어보면 하얀 종이에 아이 글씬지
어른 글씬지 뭐라 뭐라 써 붙여놓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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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사용법
① 정해진 자리에 앉아 일을 본 다음
② 재통의 재를 충분히 끼얹어서
③ 삽으로 뒤의 구멍에 밀어 넣습니다.
④ 마지막으로 재를 한 삽 퍼서 본래대로 변기를 바닥에 깔아놓아야 하며
⑤ 소변은 처치하지 않아도 됩니다.
※ 밖에 나가서는 문을 꼭 잠가주십시오. |
이걸 다 읽고 왼쪽 뒤로 고개 돌리면 진짜(!) 재 통이 있고 판자 벽에
는 삽자루가 비스듬히 웃으며 기대 서 있었다.
세상에 통시치고는 이렇게 고상하고 호사하기도 해서, 거기 쭈그려 앉
아 동화책 한권을 다 보고 나오든지, 시라도 한편 쓰고 나와야겠다는 생
각이 들어 연필 종이를 찾는데, 이게 시인이 우리한테 준 최상의 서비스
라는 것이렷다.
하여튼 나는 변산을 다녀온 후로 만나는 사람마다 "시가 잘 안 씌어지
는 사람들아, 변산 가거든 시인 박형진의 작은집에 들러 시 한편 쓰고
오소!" 입이 달싹거려 참지 못한다.
그날 밤, 시인은 우리가 정박한 모항 부근,겨울 파도가 솥뚜껑만한 달
을 불러내던 바닷가 민박집에 끝내 오지 않았다.
-「'녹색평론' 2002년 3-4월 통권 제63호」에서
 참나무마을풀: 변산에 가면 저 '호사스런' 박 시인의 작은집을 꼭 둘러보리라, 혼자 마음 먹습니다. --[11/11-11:32]--
참나무마을풀: 푸짐이 꽃님이 아루 보리.... 농사짓고 고기도 잡으며 시를 쓰는 박 시인의 네 아이들 이름. 위로 딸 셋. 그런데 늦둥이 막내아들은 급한 김에 길바닥에서 낳았다고 합니다.('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113째 쪽, 박형진 지음/디새집) --[11/12-08:52]--
해담풀: 지금도 제 친정어머니는 재래식 화장실을 쓰십니다. 저도 급할 때면 가끔 이용하지요. 그 인분을 활용하여 짚과 섞어서 켜켜이 쌓아놓은 두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냄새난다며 코 틀어막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제 친정에서는 똥푸는 날은 기어이 비계낀 돼지고기로 널널한 김치국으로 한 끼 떼우던 '풍성한' 날이었습니다. 어쩐지 '조계산 선암사의 해우소'가 생각나기도 하군요. --[11/12-11:12]--
참나무마을풀:
똥 푸는 날이 바로 '풍성한 날'이었다는 해담풀님의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저 같은 사람들은 그런 푸세식 화장실에 대한 추억이 각별하지요.
선암사 해우소도 생각나게 하셨으니, 비 오는 가을 저녁, 이 시도 읽어 봅니다.
선 암 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解憂所) 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창비)에서 --[11/12-18:27]--
참나무마을풀: '생명의 대안은 없다'는 말이 자꾸만 생각나는 저녁입니다. 천성산...도롱뇽...지율 스님...다급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분주할 풀씨님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떠오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가까운 이들에게 급한 소식부터 전하는 일이겠지요. --[11/12-19:18]--
 Click="fork('mail_form')" title='visual-yo-@hanmail.net'>요한: 실례지만 박형진 시인이 어디사는지 알고싶어요. --[05/29-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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