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목마와 숙녀

- 박 인 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ㅁ 가을의 유혹


-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무른 서울의 露臺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거리며
적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廢園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양복과 목관약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있다.

*
저 황량한 1950년대 한국 문학사의 뒤안길에서 명동백작, 문단의 신사, 낭만주의자, 앙팡
떼리블(enfant tribble) 등의 별명이 따라 다녔던 멋쟁이 시인, 박인환.
전쟁 후의 극한 상황에서도 허무와 절망을 뒤로하고 꿈과 낭만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한줄기 맑은 눈물과 함께 크나큰 위안을 선사한 시인.
그는 순수 서정시를 써서 헐벗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식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뭇 사람들에게 그다지도 사랑 받고 애송되는 그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은 분단의 질곡과 정신적 공황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어찌보면 그의 지나친 센티맨탈, 소녀적 페이소스(파토스pathos)를 두고 현실을 외면한
애상적 낭만주의라고 평할 수 있으나 (이를 두고 당대의 시인 김수영은 늘 못마땅해했고
불만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면 김수영이 추구한 새로운 시세계에 대하여는 대중이
쉽게 따라오지 않았으나 박인환의 애독자들은 늘 그를 추앙하여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아무튼 그의 시는 지금도 심금을 울리고 있다. -바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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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강원도 인제(麟蹄) 출생.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平壤醫專) 중퇴.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경영. 많은 시인들과 교류하며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거리》 《남풍(南風)》 《지하실(地下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試論)》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에 김경린(金璟麟) ·김수영(金洙暎) 등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대열에 끼었다. 1955년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간행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新協)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다. 《세월이 가면》 《목마(木馬)와 숙녀》 등은 널리 애송되는 시.
그는 전후 50년대의 가난, 분단의 비극, 퇴폐와 불안 등 시대적 고뇌를 신선하고 참신한 리듬에 실어 노래하였다. 그래서 좌절과 허무의 시대에 살아남은 진정한 모더니스트라는 헌사가 따라붙기도 한다.

사랑은 가고/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우리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 눈동자 입술은/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저는 음악 띄우는 법을 아직 모릅니다. 이 시를 읽으신 후 누가 위 시를 가사로 한 노래를 띄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0/24-17:56]--

참나무마을풀: 벌써 여러 해 전 늦겨울, 망우리 시립묘지에 간 일이 있습니다. 햇볕 따스한 날, 망우리 묘역은 의외로 깨끗하고 고즈넉해서 산책하기에도 그만이었습니다. 비탈진 서쪽 기슭 중간쯤에서 우연찮게 박인환 시인(1926~1956)의 묘지와 묘비석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비석 위에는 '세월이 가면'이라는 제목과 함께 그 싯귀절이 단 석 줄로 쓰여 있었지요.'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오래된 그 시를 노래로 함께 들어봅니다.



세월이 가면/박인희 노래 --[10/26-10:49]--

바냔나무:

사랑하던 사람의 이름을 잊는다는 일; 그 이름은 이미 잊은지 오래되어 생각나지 않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다는 구절에 대하여, 나는 의문을 제기했었다.
어떻게 이름도잊은 옛사랑을 말하며 그 눈동자와 입술만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갖던 그 때가
마치 몇년전 같은데 중년을 넘어선 나는 지금 다시 이 시를 읊조리고 있다.
그 무렵에 즐겨 듣던 상숑가수 박인희의 애절한 음색과 함께.

정말로 <사랑은 가고/옛날은 남>게 될 것인가? <여름날의 호숫가/가을의 공원>을 떠올리면 내 가슴엔
늘상 낙엽이 듣는데... , 그래서 하염없이 <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우리의 사랑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일까.
참나무마을풀님의 도움으로 이 곡을 듣게 되다니 무척 반갑다. 그와 내가 캠퍼스 벤치에 앉아 함께 흥얼거리
던 음악이므로. 락이나 째즈에 귀익은 분들께는 혹시 누가 되지 않을지...


--[10/27-00:31]--

click="fork('mail_form')" href="http://www.fulssi.or.kr/technote/main.cgi?board=poem&command=guest_email&tomail=lovetree.kang@samsung.com&toname=겨울길" target=hxg>겨울길:

십수년전 이름도 잊혀지지않는 한여자를 가슴에 묻은 적이 있습니다. --[10/29-08:26]--

click="fork('mail_form')" href="http://www.fulssi.or.kr/technote/main.cgi?board=poem&command=guest_email&tomail=lovetree.kang@samsung.com&toname=겨울길" target=hxg>겨울길:
그녀가 다시 새로운 인연을 만나 행복하기를 참 희망했었는데
그녀는 이제 이곳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녀에게'란 제목으로 이 가을을 반추해 봅니다....

그녀에게

水蘭 ....거리는 수척하게 마르고 돌아갈 낙엽으로 가득하지만
난 아직도 이 도시의 키 작은 플라타너스로 서 있다 너는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너 혼자 떠나가지 않았니.
나는 널 위해 천도도 올려주지 못했는데 간밤 몰아친 비바람에
어느 하늘가에서 낙엽처럼 떨어져 쓸쓸히 거리를 뒹구는 것은
아닌 지 행여 처마 끝 낙수물에 그 하얗고 외롭던 목이라도 적시는지.......

수란아 아파하지 말아라 좁쌀같은 우주 안에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고 우리가 언젠가는 겸손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리

마음에 그어지는 세월의 빗금 끝에서

아무렇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만나 언 손 호호 불며 오랜 이야기를 나눌 때...

--[10/29-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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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 아니 그보다 오래오래, 이름을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일은 아름답고 애틋한 일입니다.
겨울길님의 잊을 수 없는 사랑, 수란(水蘭)님께서도 <수척하게 마르고 돌아갈 낙엽으로 가득>한
가을의 이 골목에 <이 도시의 키 작은 플라타너스로 서 있>는 겨울길님을
잊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10/29-2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