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틍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 시집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1998, 창작과비평사)에서
 참나무마을풀: 항상 길 떠나는 시인이 마침내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와 다시 발견하는 세상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입니다. 어느 날 문득 떨치고 나선 고향 찾아가는 길, '길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시인은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된 몇몇 옛 친구들이 느티나무 아래 오랜만에 모였습니다. 저마다 제 몫의 삶을 엮어오며 제 몫의 나이를 먹었습니다. 고향 물가의 냇돌들처럼 모서리가 편안해졌습니다. 한 친구가 건네주는 명함 위의 강아지풀 그림이 우리를 즐겁게도 하고 생각을 하게도 했습니다. 오래된 그런 것들이 내게도 찾아와 다시 '세상의 전부'가 되는 날이 올까요. --[08/24-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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