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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속의 뽕나무 그늘
  글쓴이 : 최정례     날짜 : 06-11-20 21:03     조회 : 7315    
 
잠 속의 뽕나무 그늘
 
 
구름에 머리채를 맡긴 여자 하나가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총총히 까만, 혹은 빨간 열매들에 눈길을 매달다가
오디 짖이겨져 피처럼 얼룩진 그늘 아래
누군가 미친 듯 열매를 따다가 짓밟고 달아난 흔적에
 
아니, 어느새 오디가 다 익어버린 걸까
어느새 깜깜한 밤의 바다를 건너
잎사귀 갈피갈피 끌고 왔다가는
 
아니, 어느새 아이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가
새벽같이 뛰쳐나가는 것들을 붙잡고
 
누가 몸에 그물을 덮쳐 팔다리에 돌덩이를 매단 듯
잡아 늘어뜨리는 걸까
일어나야 하는데
사방에서 오디 익어 떨어지는 소리
진보라 흥건한 오딧물 들거나 말거나
얼른 치맛자락 펼쳐
저 검은 열매들 몽땅 따 담아야 하는데
 
이빨을 혓바닥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이리 떼처럼 열매를 탐하는 저들 쫓아
 
달디단 뽕나무 짓이겨진 가지 지나면
몰래 또 숨겨둔
어린 새끼 뽕나무 순진하게 기울어 서 있는 비탈
갈피갈피 다 알고 있는데
 
잠의 그물에 팔다리가 얽혀
 
아니, 어느새 한 둔덕에서 수십 년을 서서
까맣게 농익은 열매 호들갑스럽게 떨어지는데
밟혀 짓이겨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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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어젯밤 꿈엔
말만큼 거대한 토끼가 말과 함께 서 있었다
얼룩무늬를 하고
토끼가 왜 저렇게 크냐고 했더니
식용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갑자기 토끼가 앞다리를 들어 악수를 청하는데
그것은 사람 발톱 색깔을 한 말굽이었다
토끼와 악수를 한 사람도 토끼라고
사람들이 수군댔다
토끼가 어떻게 사람의 형상을 할 수 있냐고
토끼라면 입 모양쯤은 토끼처럼 생겨야지 했더니
먼 먼 조상이 토끼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조금쯤은 토끼를 닮아야 하는 거 아닌가
 
깨어나 거울을 보고 입을 오물거려보았다
이상한 동물이 내게로 온 것이 아니라
얼룩무늬를 뒤집어쓰고 그 시간을
이 황량한 방 안을
내가 급히 지나가고 있는 거겠지
 
 
최정례<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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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에는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존버그 산문집들을 몽땅 사고 새로나온 시집도 샀습니다. 열심히 읽어야지요.
최정례 시집을 보면서 언제나 냉정하다는 인상을 받곤 했는데 이번 시집은 조금 다릅니다. 냉정하긴 여전한데, 뭔가에 홀린 듯합니다.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뻥 하고 터지는 데가 있습니다. 반전이라고 해야 할지..그래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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