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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의 꿈 - 박두진
  글쓴이 : 풀꽃세상     날짜 : 15-12-29 00:43     조회 : 1893    
녹색의 꿈 - 박두진 (박두진 전집 , 범조사, 1984)

고향이었다. 어릴 때였다. 풀밭, 들길, 논두렁길이었다. 민들레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오랑캐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아침 이슬이 발끝에 차였다. 후르륵후르륵 벼메뚜기가 날았다. 짹, 찌기 찌기 찌기 찌기……짹, 찌기 찌기 찌기……, 여치가 한 마리 울고 있었다. 아무도 없고 혼자였다. 햇볕이 쨍쨍 뜨거웠다.

둑 아래 맑은 웅덩이에 붕어떼 노는 것이 보였다. 금붕어였다. 붉은 빛, 깜정빛, 무지개빛 열대어였다. 잡고 싶었다. 어릴 때 마음 그대로, 훌훌 벌거벗고 뛰어들어 모조리 훔켜서 잡고 싶었다. 가슴이 두근댔다. 잡을까 잡을까 망설이는데 이상했다. 갑자기 붕어가 간 곳 없고, 한 마리씩 한 마리씩 호랑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마음이 언짢고 슬펐다. 그렇고나, 내가 지금 어릴 때 고향으로 낙향을 온 거지, 정말 그렇게 절실하게 실감이 나는 실감. 그 죽음의 도시 서울, 모든 것 다 버리고 영원히 이곳으로 낙향을 온 거지, 혼자서 엉엉 울면서 걸었다.

개구리가 한 마리 펄쩍펄쩍 뛰었다. 주먹만한 청개구리, 얼룩덜룩한 콩밭의 청개구리. 헐덕헐덕 당황하며 바로 내 발 앞을 가로질렀다. 이상했다. 다시보니, 새끼 뱀장어만한 독사가 한 마리 청개구리의 덜미를 깊숙히 물고 늘어져 있었다. 가엾어라 청개구리가 죽는구나 저렇게 먹혀서 죽는구나 하고 망설이는데 이상했다. 청개구리가 커다랗게 한 번 땅재주를 넘더니 큰 입 쩍 벌리고 독사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신났다. 햇볕이 쨍쨍 쬐이고 있었다.

저만치 동네가 하나 보였다. 둥치가 붉은 적송이 몇 그루 서 있고, 초가집이 네댓 집,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동네였다. 쓸쓸하고 슬펐다. 저기가 아마 옥이네 동네 저 집이 바로 옥이네 그 집, 쑤루룩 쑤루룩 가슴이 무너졌다. 어디 갔을까, 어디 갔을까, 그 눈동자 까만, 눈썹 까만, 희디 흰 살결의 어릴 때 옥이. 어릴 때 그 때처럼 훌적훌적 울었다. 옥이네 옛 동네는 비어 있었다.

가도 가도 풀밭, 아무도 없고 나 혼자뿐이었다. 쨍쨍 햇볕이 퍼붓고, 모든 것 다 버리고 온, 죽음의 도시 서울 영원히 영원히 아득하고, 띠리루루 띠리루루 낮 귀뚜라미 잊은 듯 다시 울고, 민들레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오랑캐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온 들 온 풀밭, 가도 가도 아무도 사람이라곤 없고, 사실은 어디로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주여 나 여기에 왔나이다. 여기에 홀로 있나이다. ―풀밭 빈 들 어릴 때 그 고향 그 논두렁……흑흑 느끼는데 이상했다.

아까 그 개구리 녹색 얼룩개구리가 펄적펄적 나타났다. 금테두리 두 눈, 금테두리 입, 금테두리 두꺼비처럼 불컥불컥 숨을 쉬며, 볼 동안에 크게 크게 온 몸뚱이가 부풀어올랐다. 거대한 몸뚱어리, 주홍빛 거대한 입 쩍 벌리고, 놀라웠다. 하늘 중천의 햇덩어리, 주렁주렁 내려오는 금빛 열 개의 햇덩어리를 하나씩 늘름늘름 삼켜 버렸다. 온 들에 뒤떨어져 나만 혼자 서 있고, 대낮인데 어둠 펑펑 밤눈 펑펑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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