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자연론: 아자연(我自然)

일찍이 인류에게 자연은 신성한 곳이자 돌아갈 곳이며 영감의 원천이었다. 인류는 신화와 시적 상상력을 자연으로부터 자극받았을 뿐 아니라, 도덕과 정치의 기준을 자연에서 찾기도 하였다. 공자의 왕도정치도 결국 궁극에서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었기에 노자의 무위정치를 이상으로 공유할 수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서양의 민주주의의도 자연적 존재인 인간의 타고난 권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인위인 문명과 무위인 자연은 필연적으로 긴장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문명이 심화될수록 자연은 투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결과 미개 내지 야만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자연에 대한 매도와 전도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면 할수록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와 오해도 심화되었다. 문명의 심화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때문에 역사의 과정은 문명과 자연 사이의 긴 불화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생태학을 주장한 머레이 북친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와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계급이 발생하고 권력이 독점될 수록 인간과 자연의 착취도 심화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자연도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그런 과정 속에 문명에 대한 반성과 자연에로의 회귀 내지 조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광야와 산에서 자연의 메신저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제국이 등장하기 시작한 문명의 초창기에 문명의 성취와 이기를 부정하고 자연 안에서 자연인으로 살았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인류의 예언자와 스승들이 나타났다.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자들과 석가모니, 마하비라, 중국의 노자, 장자, 그리스의 자연철학자와 피타고라스, 유태의 예언자들과 예수 등 그들의 문명 비판은 거의 동일했다. 부와 권력의 독점이 행복의 요인이 아니라 절제와 사랑이 행복의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점과 지배에 의한 착취-그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는 물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착취도 포함한다-를 포기하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을 삶과 사회의 원리로 채택하자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탄생한 고등종교와 철학의 메시지는 대략 비슷했다.

하지만 문명은 그들의 메시지와 경고를 종교로만 구축한 뒤 외면하고 말았다. 문명의 길은 오히려 부와 권력의 추구와 독점에 의해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심화되어 왔다. 전제정치와 더불어 전제적 자본주의는 그것의 극단이며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세계 고등종교들의 탄생기인 차축시대와 현대 사이에 우리는 근대 시민혁명을 낳게 한 계몽주의 시대의 자연권 사상을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문명이 심화된 유럽에서 출발한 천부인권의 자연권 사상은 사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양을 받은 것이었다. 지배와 소유의 탐욕으로 식민지를 개척해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서 마주친 것은 자연 안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고 또 고상하게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이었다. 고귀한 야만인으로 불리운 그들에게서 유럽의 지성들은 인간의 잊혀진 가능성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진정한 근거를 아메리카 인디언에게서 재발견했던 셈이다. 자연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자연권 사상이야말로 근대 시민혁명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절대주의의 전제국가를 대신할 새로운 공화국은 존엄하고 평등하게 태어난 자연인의 시민적 동의에서만 정당한 것이었다. 실로 차축시대 이후 1500여 년 만에 맞는 인류정신의 도약기이자 터닝포인트였던 것이다. 묘하게도 그것의 영감은 자연에게서 왔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문명은 이를 다시한번 배신하게 되는데,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기보다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지배 심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자연권에서 중요한 것은 각자의 고유한 자기원인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차축시대에도 울려 퍼졌던 복음이었고, 둘 다 자연의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타인의 부와 권력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고유한 양심과 동기에 의해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이 잘나서 외쳤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 자체가 독존적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을 우리 사이에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 것도 마찬가지다. 유교와 도교가 이상으로 삼는 무위정치의 실현기인 요임금 시절 백성들이 임금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막대기로 장단을 맞추며 ‘아자연(我自然:나 스스로 그랬다)’이라 노래했던 것도 결국 참된 행복과 이상적 정치란 개인의 고유한 자기원인성의 실현에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말 안에는 인간의 조엄성과 자유와 평등이 모두 담겨 있다. 여기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계몽주의의 핵심인 자연권의 재발견은 결코 새로웠던 것이 아니다. 수운 최제우가 밖의 천자(天子) 대신 각자 안의 하느님을 재발견한 것이 동학혁명의 근원이 되었던 것도 자연의 동일한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개체의 자유(自由:개인의 고유한 자기원인성)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근거였던 셈이다. 노자의 소국과민은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이제 부와 정치력을 독점한 유산자와 통치자의 지배에 대해 항거할 근거가 마련되었다. 문명의 부작용을 치유할 해결책이 이미 자연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계몽주의 이후 근대 시민혁명의 목표인 시민권이란 실로 자연권을 사회 안에서 구현한 사회적 자연권인 셈이다. 덕분에 우리는 근대 300여년간 거센 정치적 혁명기를 겪었다. 그리고 미완의 반쪽 공화국이나마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부와 권력의 독점과 지배를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를 사회의 중심원리로 삼게 될 줄이야? 정치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커녕 정치 없는 시장자본주의사회가 도래하게 되었다. 더불어 지배와 착취는 더욱 강화되어 자기원인 대신 자본과 권력의 노예가 되어 우리는 자기를 상실하고 생태가 파괴되어 새로운 생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연을 오로지 물질적 자원으로 둔갑시킨 자본주의는 바야흐로 멸종위기를 넘어 대파국의 수준을 예감케 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인으로 태어나고 있지 않다. 도시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도시인으로 태어나고 자란다. 도시가 메트로폴리스에서 메갈로폴리스로 다시 코스모폴리스로 진화하는 동안 인간은 도리어 자연적 힘이 퇴화되고 철저히 도시에 의존해야 살 수 있는 기생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우리는 문명에 대한 통찰력과 통제력을 이미 잃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연에 대한 기본 감수성과 경험,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고 왜곡된 시대를 살아가며, 너무나 거대해진 문명의 메트릭스 안에 갇혀 생존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게 되었다. 자연을 자원 아니면 야만의 시각으로밖에 볼 줄 모른다. 아도시인(我都市人)은 아자연의 고유한 자기원인성을 발휘할 수 없어 근원적 무기력에 처해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그 자체가 아자연(我自然)인 것이다. 모든 악조건 속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연에게 돌아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답변을 아자연(我自然)에서 찾는다. 내가 곧 자연이다. 내 안에 무한한 자연이 함께 있고, 그것 스스로가 삶을 자극하고 있다. 나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낙관하고, 외부의 권위와 명령을 스스로 단절할 수 있어야 한다. 각자가 타고난 고유의 자기원인성이야말로 삶의 방식이고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의 절멸과 생태의 대파국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자연에게서 영감을 받고 자연 안에서 삶과 사회의 운영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축시대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자연이 3번째로 우리를 다시 호명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차례다. 돌아온 탕자처럼. 가진 것을 버리고 자연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일방적인 도시탈출을 강변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가 도시에서 살건 자연에서 살건, 스스로 살고, 스스로 사는 사람들끼리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공동체와 네트워크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믿을 구석이 없다면 도시가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글을 맺을 무렵 역설적이게도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텔레비전 메시지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 굴종하지 않고 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자연인이다. 나 자신의 고유한 원인에 의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자연인이다. 그리고 남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할 수 있어야 자연인이다. 사회란 그런 사람들의 모여 사는 곳이지 부와 권력을 쥐기 위해 경쟁하거나 부와 권력을 쥔 자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