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었어?
"아니, 아빠, 방 아이들과 시켜 먹을거야."

 

둘째에게 전화를 했다.

 

"밥 먹었어?"

"아니, 아직 밥 시간 안됐어"

"오늘, 기숙사 밥 준데?"

"아! 맞다...물어 보고....어......"

"아니, 아빠, 오늘 밥 안준데...친구들하고 나가서 먹을게....."

 

첫째의 전화였다. 똑 같은 질문을 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대화 내용에서 처럼 두 아이의 성격이 몹시도 다르다. 섬세하고 예민한 둘째 아이는 조심성이 있고, 과감하고 주변 상황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소신있게 자기 일을 밀고 나가는, 때로는 그것이 무모하기까지 하지만 눈치 보지 않는 일 솜씨에 우직하고 성실한 것은 첫째 아이다.

첫째는 OCN 영화 촬영팀 연출팀에 픽업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길로 기숙사에 들어가고 둘째는 내가 태워주었다. 그리고 허전한 마음 달랠길 없어 전 선배와 막걸리 한잔을 했다.

이번 겨울 몹시도 추웠지만 난 행복했다. 두 아이의 꼼지락거림을 눈 앞에 볼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내가 선택한 시골살이의 불편함에 말없이 따라와 준 아내와 아이들에게 겨울 내내 미안했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고개 조차 들 수 없었다. 세 여자가 생활하기에는 턱 없이 좁은 공간, 게다가 시골 집이라 난방이 제대로 되지도 않았고, 급기야는 2 주일간 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과 나는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아이들은 고모집에서 낙풍 할아버지 집에서 전전긍긍 하다가 각자의 기숙사로 돌아 간 거였다.

작년, 아이들을 훌쩍 떠나보내면서 나는 몹시도 우울했었다. 처음으로 내 품에서 떠나는 내 새끼들.......대단히 급진적인 내 교육철학 하나만 믿고 영문도 모르고 자신의 길을 꾿꾿이 따라와 준 아이들이 대견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는 살벌한 세상에 자식을 내보내는 어미였다.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아이들에게 모진 소리를 했다.

 

"이제.......엄마 아빠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 일이나 신경써라......엄마 아빠에게 전화도 자주 안해도 된다...친구들과 잘 사귀고 너가 진정 하고 싶은 일에만 신경을 써라....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세상의 인연에 비하면 모래 알 같이 작은 거다.....

아빠  보고 싶어 하지도 말아라...아빠도 아빠 일에만 신경 쓸거다.....알았지?"

 

나의 이 말에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황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큰 아이는 엄마에게 아빠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럴 법도 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세상은 어차피 헤어지는 것이고 이승에서 만나는 시간에 너무 연연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 보다, 이제는 아이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것이다.

 

전 선배와 마신 막걸리 취기에, 내리는 진눈깨비가 마치 밀가루 처럼 보인다. 비는 점점 굵어지더니 눈으로 바뀌고 있다. 해안가 산위에는 벌써 눈으로 하얗게 보인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애물단지 닭들과 애견 데니. 아침에 수탉 울음소리에 잠이 깨고 데니의 재롱에 흐믓해하고 그들의 먹이를 챙겨주고......그리고 봄이 되면 나는 이제 농부가 되는 것이다.

난, 이제 아빠라는 인연 보다 농부라는 인연이 이 세상과의 마지막 일 것 같다.

 

혹시, 나의 깨달음이 더욱 깊어진다면 중이 될지도........

 

 

 

무슨 놈의 대학교가 그리 무지막지 한지. 대로변에서 1 키로 이상 걸어들어가서 마치 청와대를 연상시키듯 산 밑에 대궐 같은 집들이 즐비하고....도무지 학교인지 절대자가 군림하는 왕궁인지.....
벌써 외관 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권위적이고 절대적인 것들을 타파해야 할 학교에서, 벌써 학교의 외부 형식이 저 모양이니. 그래도 영화과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말 하나만 덜컥 믿고 딸아이를 맡겨 놓긴했는데.....마음은 어지럽기 그지 없었다. 언덕 길을 내려오는 내 발 걸음은 갈짓자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문득, 기숙사에 혼자 남아 있는 첫째 딸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 앞에서는 웃으면서 당당하게 "아빠 말 명심하고 잘 해" 하고 나왔지만, 문을 닫자말자 다시 들어가 딸 아이를 안고 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슴이 미어져 오고 이윽고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러나 나는 애써 눈물을 지우고,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딸 아이의 모습을 머리에서 지우기 시작했다.

"그래, 이건 신파야. 내가 딸 아이가 가여워서 우는 것은, 지독한 신파일 뿐이야. 이제 너와 나는 각자의 길을 가는거야. 너와 나의 부녀의 인연은 만물의 인연에 비하면 모래알 같은거야. 넌 이제 내 딸이 아니야. 너는 절대로 앞으로 아빠를 생각하면 안돼. 사회를 생각하고 만물과의 인연을 더욱 중요시 여겨야 해. 아빠를 절대로 보고 싶어 해도 안돼. 아빠를 가능하면 만나려고 하지마. 아빠는 아빠 일 알아서 하고, 너는 너의 일 알아서 해. 가족 간의 사랑, 그건 별거 아니야. 세상에 사랑 할 것은 너무나 많아. 가족의 사랑에 함몰 되어 진정 사랑할 것에 대해 게으르면 안돼.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야!"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순간, 눈물이 마르고 가슴이 환해졌다. 딸 아이는 이제 남이었다.

"너, 방에 같이 있을 룸메이트 들어왔어? 너 밥 먹었어? 방 따뜻해? 아빠 절대 보고 싶어하면 안돼. 알지? 너 아빠 사회주의자인 거 알지? 너, 가족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영화를 생각하고..예술을 생각해..알지?"
".................. 흐흐흑....."

첫째 딸과의 대화였다.

"기숙사 아이들 다 들어 왔어? 밥은 먹고..? 엄마는 몇시에 갔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도 참아. 우리 원주 착하지...아빠도 이제 서울서 내려 갈거야."
"아빠..흐흐흑..."

둘째 딸과의 대화였다.

두 아이는 모두 내 전화를 받고 울었다. 그러나 나는 씩씩하게 울지 않았다. 절대로 전화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었는데 동서울 터미날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마신 소주가 말썽이었다. 그놈의 술기운에.

이제 딸들은 떠나갔다. 비록 첫째는 두서너달에 한번씩, 둘째는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올터이지만, 나는 이제 그녀들을 놓아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녀들도 인연과 가치를 만들어 가듯이, 나도 나만의 가치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