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세상이여, 영원하라

별풀 이문수

 농삿꾼답지 않게 사과농사를 지어온지 스무해가 넘는다.

 그나마 그 농업이란 것도 도시생활의 연속선상에 시작됐다.

 말이 스무해지, 스무해를 제대로 흙속에서 살았다면 지렁이로라도 변신이 될 수 있어야 되는게 아닌가.

 상대적인 삶에서 좀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생각에 귀농을 한듯 한데 벌써 스무해가 훨씬 넘었으니 기억도 느슨해졌다.

 그림 그리는 것을 밥먹는 기술로 삼았던 삶이니 그 당시 분위기로는 굶어죽기 딱 맞는 직업인 셈이다. 지금이야 삶이 딱 들어맞는 옷을 입은듯이 제법 어울리는 티를 내지만 그것도 아직 시늉에 불과하다.

 어떻든지 그림이나 실컷 그려보자 싶었다. 사과나무 수백그루가 펼쳐져 있는 밭에서 내 자식이나 되는 양, 이 나무도 그려보고 저 나무도 그려보고, 학교 다닐때 유난히 나무를 좋아했던 기억이 이 지경까지 만든게 아닐까.

 죽치며 눌러앉아 도끼자루를 썩히려고 하는데 세상의 물결은 이 순진한 아이를 그냥 두지 않는 것이다. 도끼질을 해보란다. 나대기 좋아하는 성질에 여기저기 돈 되는 삽질에 휘젓고 다니니 미친 시라소니같이 영락없이 서리맞은 서울쥐 꼴이었다.

 농사를 천하지대본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처한 형편에 따라 끄달리다 보니 멋부리기농사가 되어 그야말로 농자도 모르는 헛농사꾼이 되었었다. 하늘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면서 거들먹 거렸던 내 꼴을 상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한바가지다.

 쉰이 넘어 큰 물난리 한번 치르고 나서의 일이다.  아이엠에프 즈음, 발버둥 치듯이 살던 어느날, 김종철씨가 계간으로 펴내는 녹색평론을 읽게 되었다. 풀꽃세상을 처음 만든 왕풀 정상명님의 글이 있어 한참을 읽어 가는데 내 읽는 눈이 없어졌다. 눈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조화런가. 분명히 생시인데, 내 몸도 분명 여기 있고, 책도 있고, 이 공간에 책을 읽는 나도 여기 있는데 느끼는 나는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이었다. 생시꿈을 꾸는거였다.

 지금 기억에 무지하게 많이 울었다. 내 인생에서 그리 많은 눈물을 쏟아낸 적은 없었다.

그 어머니의 슬픔을 내가 왜?

 한참을 울다보니 그제서야 내 몸이란게 느껴질 만큼 눈이 아픈게 느껴졌다. 눈이 시리던 기억이 난다.

 우리네 몸은 지독한 느낌이나 감정에 휩싸이면 분신의 기술이 있는듯 하다. 그 뒤부터는 조금만 슬퍼도, 자그마한 기쁨에도 퍼질러 운다. 아마 생각보다는 감수성이 발전해 가는 것 같았다. 울고 나면 좋았다. 온천하가 사랑천지로 바뀐다

 그때부터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우리 몸에는 지나친 슬픔은 동시에 공유할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남자라는건, 몸의 구조와 기능 때문이지 본래부터 남자인건 아니다. 우리 본래의 영혼에는  남여 구별이 없지 않을까. 영혼에 성의 구분이 있고서야 어찌 한 여인의 슬픔을 몸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때부터인 것 같다. 아둥바둥하던 세상살이가 멀뚱멀뚱, 소 닭보듯 구경꾼이 되가며 삶이 시들시들 해지는 판에 풀꽃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 풀꽃 카페를 열었던 때 쯤인듯 하다.

 와~ 신명나게 돌아가는 판이 생긴 것이었다. 모든게 새로웠다. 가뭄에 단비 같았다, 아니, 그냥 단비다.

 처음 불러보는 풀씨명이며 끼리끼리놀던 중장년대에서, 남녀노소 꼴없이 노는 풍광이 마냥 즐거웠다. 이슬떨이인가? 아이들 게시판방이 있었는데 더없는 천사들이었다. 홈페이지에 개인방들을 만들어 주어 한 마을을 이루고, 그 속에서 어울리면서 이장도 뽑고 마실도 다니고.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의 하나로 남아있다. ‘나’라는 꼴이, ‘나’라는 늙다리가 젊은이로 새롭게 변해가는 듯 했다. 마냥 즐거운 시절이었다.

 좋은 영화를 한편 찍은 듯, 그간의 풀꽃세상살이는 내 과거의 삶들을 바꿔 버린듯 하다. 이제는 대지며, 비, 구름, 뭇 생명들까지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햇님이 하라는 대로 한다. 농사에 관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스러운지 모른다.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도움을 주신분들, 가족, 이웃, 풀씨들, 수많은 이슬떨이들.. 나는 새몸을 얻었다. 내 몸을 내 몸으로 알기까지 그리 많은 세월이 필요했는지.. 감사할 줄 아는 삶 자체가, 사랑의 연속적인 어울림이란걸 늦게나마 알아차림에 고마울 뿐이다.

 매일 맞이하는 아침, 그 햇살에 하루를 맡겨본다. 내 몸이라는 어제의 빛모음들이 오늘, 또 다시 새로운 창조의 길을 나선다..

 ‘풀꽃세상’으로 다시 태어났던 ‘천초영’. 그 스무살 처자는 많은 사랑을 남기고 갔다.

 나같은 중늙은이에게도 진정한 감사와 사랑을 나누어 주고 갔다. 어느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값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 풀꽃세상에 ‘사는동안 똥풀’이라는 풀씨가 있는데 그 풀씨작명에 놀랐다. 사는동안 똥만도 못한 삶을 꾸려온 내가 아닌가. 부끄럽다. 구수한 똥을 누어보는게 소원이다. 아니 구수한 똥이 되고싶다. 나는 똥이다. 누우런 황금똥.^^

 마지막으로 한마디 외치고 싶다.

 풀꽃세상이여, 영원하라~ 팍팍!  별풀 도사는 오늘도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