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다음날  노혜경 갈비뼈 아래 어딘가 특별히 마련된 주머니가 있다. 내가 알아서는 안 될, 알고 싶지도 않은 건가, 그런 세상의 비참이 길을 가로막을 때, 발바닥과 손바닥이 알아서 조용히 그것들을 들어다가 그 주머니에 채워놓는다. 손가락을 있는 힘을 다해 바지가랑이에다 닦는다. 갑자기 심장이 지맘대로 후도독 튀어오르고 몸안 어딘가에 숨겨놓은 세상의 시계가 온 목청을 다해 뚝딱투닥 거리면, 그 주머니의 입구가 비지기 열리는 순간인 것이다. 도무지…. 할아버지 학교에 갈 수가 없어요라고 어린 내가 울부짖던 그날 아침에 할머니는 조심조심 방비를 들고 나와 마당을 쓸었다. 찰흙바닥 가득히 어디선가 공포처럼 등장한 지렁이떼, 굵기가 어린 내 손마디보다 더 둥그런 벌건 살들, 껍질 벗겨진 상처들 같은, 연신 혀를 쯧쯧 차며 물을 뿌려가며 할머니는 마침내 손바닥으로 새끼 구렁이만한 지렁이들을 마당가로 쓸어내시고, 난 발을 동동 구르다 구르다 콧물범벅이 되어 열까지 내었다. 미물들이 우리 아가 길을 가로막는구나,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 동구밖까지 가는 동안, 난 할아버지 발바닥에 미끈거리는 생물이 밟혀 터지는 감촉이 통쾌하고도 끔찍하여, 입가에 침을 흘리며 혼절하였다. 꿈속에다 기어이 만들어놓은 진흙밭, 깻잎콩잎 대궁이 아래 지렁이들의 시체가 즐비하다. 아무리 흔들어깨워도 눈뜨지 않는 ‘미물들'. 아가, 사로잡히지 말아라, 할머니는 말씀하셨지만, 지렁이 썩어 고인 물웅덩이가 마르고 난 뒤 질퍽한 흙 한 줌이 나는 무서웠다. 갈비뼈 아래 주머니가 생긴 건, 이 물렁한 것들이 나를 뻐덩하게 사로잡아서다, 털컥털컥 쿵닥쿵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