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하느님, 지렁이 부처님 

얼마 전 나라의 중대한 결정을 딱 하루 앞두고,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이 세 걸음마다 한 차례씩 절하며 서울 바닥을 나아간 적이 있습니다. 절박함 모두 짊어지고 무릎으로 온몸으로 기어간 적이 있습니다. 입 다물고 기도하며 나아간 사람은 분명 두 분뿐이었습니다. 그 뒤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지렁이 하느님, 지렁이 부처님

실로 오래 전, 2억만년 전에 이 별에 와서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발 없는 발로 기어가고, 
손 없는 손으로 만져보는 이 땅별의 살(갗) 
눈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마을의 살림살이 
당신이 보기에도 좋을 리 없습니다. 

지렁이 하느님, 지렁이 부처님 

뜨거운 허드렛물을 수채 구멍으로 바로 버리지 않았던 우리 어머니들의 공경심, 길을 갈 때 미물들을 함부로 밟지 않겠다는 우리 아버지들의 조심,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땅 속에서 기어가는 하느님, 
오늘도 땅 속으로 기어가는 부처님. 
토굴 속에 든 수행자들, 먼지 속의 수도자들 모두 
주기도문이나 반야심경 미루어 놓고, 
맨 무릎으로 온 몸으로 기어가야 하겠습니다. 

지렁이 하느님, 지렁이 부처님 

갖은 제사, 온갖 예배보다 
내 안에 당신을 모셔들입니다. 
당신보다 더 징그러운 
내 안으로. 
내 안으로 당신을 모셔들입니다.

* 제7회 풀꽃상 시상식 때 발표한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