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농사 얘기 좀 들어보세요

이승철

초보농부 일기(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

오늘은 소똥으로 만든 퇴비를 과수원에 뿌리고 밭을 갈았습니다. 넓지 않은 밭이지만 초보 농부인 저로서는 그것도 적지 않은 품이 들더군요. 나중에는 삽도 내팽개치고 그냥 손으로 퇴비를 떠서 경운기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일하다가 잠시 쉴 겸해서 풀밭에 털썩 앉았지요. 때마침 봄바람이 상큼하게 불어오더군요. 

그렇게 땀을 식히며 지친 몸을 달래다가 무심코 소똥 범벅이 된 제 손을 보았지요. 어이없어 피식 웃는데 문득 소똥을 말려 땔감을 준비하던 인도, 네팔 아낙네들이 떠올랐습니다. 생각은 순식간에 네팔의 한 시골마을로 날아갔습니다. 그때는 소똥을 만지작거리는 저 더러운 일은 후진국 아낙네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신기한 오지 체험 정도로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손에 사진기라도 있었다면 구경꾼의 시선으로 진기한 풍경 한 컷을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저 더러운 손으로 짜파티(우리나라 밀전병 같은 인도인의 주식)를 만들어 먹는다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던가요. 이제 와 보니 그 아낙네의 손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환경파괴를 하지 않고 땔감을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손이었습니다. 그것을 네팔을 떠난 지금, 이곳 순창에서 느낍니다. 네팔 원주민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솟아납니다.

초보농부 일기(2)

팝콘을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 팝콘용 옥수수를 사서 전자렌지에 넣고 팝콘을 만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1∼2분 정도 전자렌지를 돌리면 옥수수들이 거의 동시에 톡톡 소리를 내며 고소한 팝콘이 되지요. 우리 과수원 배꽃이 팝콘을 만들 때처럼 순식간에 피기 시작했습니다. 흰색의 꽃들이 황홀한 자태를 뽐내며 온통 들녘을 횃불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지요. 이제 나는 왜 농자(農者)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배나무 옆에서 왜 농부가 되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요. 지난번 제 손에 덕지덕지 묻히며 운반한 소똥이 있는 곳에 피어난 배꽃은 더욱 더 탐스럽게 피었더군요. 그 효험(?)이 이렇게 큰 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 집사람은 냉이와 쑥을 캐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쑥과 잡풀을 구별조차 못했습니다. 이웃에 물어보고 나서 한 바구니를 캐왔는데 쑥국, 냉이국, 냉이무침 등 없는 살림 반찬값 절약에 크게 일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맛도 아주 좋았습니다. 어제는 지인에게서 진돗개 한 마리, 풍산개 두 마리를 얻어 왔습니다. 이 개들을 보니 뿌듯하고 믿음직스럽습니다. 누군가 버린 장농 문짝이 있길래 주어다 놨습니다. 이것으로 크고 튼튼한 개집을 만들 예정입니다. 배가 익어 주렁주렁 열릴 때도 다시 한번 팝콘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기대가 됩니다.

초보농부 일기(3)

그날 아침.

밤새 무섭게 불던 강한 바람과 억수같이 퍼붓던 빗줄기는 날이 밝아오고 있는 그때까지 조금도 그 기세를 누구려뜨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보세요, 여기 면사무소인데요 과수농가 피해 조사중입니다. 피해가 얼마나 되나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 파악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우장을 갖춰 입고 삽 하나 들고 밭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깊은 가을날 아스팔트 위에 은행잎 떨어져 있듯이 여기저기에 배가 우수수 떨어져 있었습니다. 까치피해를 막기 위해 과수원 전체에 씌여눈 방조망은 갈기갈기 찢여져 있었고 철제 지주는 뽑혀서 허공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아직 배가 매달린 채 통째로 부러진 가지는 과수원 바닥에 나 뒹굴고 있었습니다. 배수로는 무너져 형태를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마당앞 텃밭에는 고추가 지지대와 함께 쓰러져 있었습니다. 손에 삽을 든 채로 내리는 빗속에서 그대로 한참을 서서 망연히 처다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하는 걱정이 들지 않고 그 무더웠던 지난 여름이 새삼스러운 생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웃 농가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손으로 일일이 김매던 일. 철공소 작업을 방불케 하는 9메타 짜리 철제 파이프를 직접 절단하고 용접하면서 설치한 배나무가지유인 덕시설을 설치하던 일. 집사람에게 "밟지마 싹이 나오잖아!"라고 소리치면서, 씨를 뿌리면 싹이 나온다는 기적 같은 신비를 직접 확인하면서 신기해 했던 초보농사꾼의 여름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 땀의 결실을 눈앞에 두고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누굴 원망하고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떨어진 배 중에서 깨끗한 것은 한데 모와 가마솥에 걸고 장작불을 지펴 배즙을 만들고 나머지는 땅에다 묻었습니다. 이제 태풍이 지나간지 거의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 한달 동안 여름내 흘렸던 땀만큼을 다시 흘리면서 거의 원상복구를 하였습니다. 떨어진 배를 다시 붙이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배가 떨어져 버린 배보다 많았습니다. 복구작업을 하면서 나는 땅을 관리하는 일은 농부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땅을 섬기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겸손해져야 농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힘을 이기려 해도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오만이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습니다. 자연에 순응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저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고 그 나머지는 내 몫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늘 파랗게 개인 하늘을 쳐다보고 씨익 혼자 웃습니다. 순창의 햇빛과 깨끗한 바람으로 빚어놓은 잘 익은 매실주 한잔을 마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