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개관

제6회 풀꽃상은 그곳 지리산을 사용가치로 보고 덤벼든 어처구니 없는 댐소동 때문에 물봉선과 함께 지리산 실상사 스님들에게 드리게 되었고, 시상식 또한 실상사(實 相寺)의 뜰에서 가졌습니다. 풀꽃세상과 이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실상사는 어떤 절인가, 선우도량 출판부에서 펴낸 『구산선문 최초가람 실상사』(1997)를 통해 ‘실상사의 역사’와 ‘실상사의 오늘’을 살펴 봅니다. -- 풀꽃세상

실상사

한국불교는 선교(禪敎)가 양립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선은 불교 수행자들이 구도의 길로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행의 관문으로 자리잡고 있다. 선의 가르침이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곳이 바로 지리산 실상사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가람인 실상사는 지리산 주능선에서 뻗어 내려온 너른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색다른 산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불국사 석가탑 상륜부 복원의 모본이 되었던 통일신라 시대의 삼층석탑이 동서로 서 있다. 또 보광전을 지나 약사전 철조여래좌상 앞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머리 숙여지는 오랜 신앙의 뿌리를 경험하게 된다. 스님들이 머무는 요사채에서 흘러나오는 『화엄경』 읽는 소리를 따라 걸으면 주인을 잃어버린 거북 모양의 탑비를 만나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렴풋이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글자가 보인다. 바로 실상사가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만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응료(凝蓼)’는 최초 선종가람의 개산조(開山祖)인 홍척국사의 탑 이름이기 때문이다.

홍척국사는 가지산문의 개산조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 서당 지장선사로부터 정통선맥을 이어 받았다. 홍척국사의 가르침은 민족의 어둠을 밝혀주는 사상적·정신적 등불로 실상사 창건의 근본이 되었다. 또한 ‘실상사가 잘 되어야 나라가 부흥하고 일본을 제압하게 된다’는 도선국사의 비기에 의하여 실상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후 홍척국사의 법통을 이어 받은 수철대사는 의광·흠광선사에게 법을 전하였는데, 신라말 고려초의 실상사는 이들 제자들에 의해 크게 번창했다.

번창 일로에 있던 실상사는 조선초인 1468년(세조 16) 화재 이후(정유재란설도 있음)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스님들은 백장암에 기거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 뒤 1679년(숙종 5) 벽암(碧巖)대사에 의해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으며, 1690년(숙종 16) 침허조사에 의해, 1821년(순조 21) 의암대사에 의해 계속된 불사가 있었다. 그후 1882년(고종 19) 유생들의 방화에 의해 일부 불타기도 했으나 1884년 월송선사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690년 침허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는 사적기의 기록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조사 이후 수정되어야 한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즉 조선시대 연화문 수막새기와에 ‘선사연(禪師淵)’과 암막새기와에 ‘연항대(淵恒代)’ 및 ‘강희이십년유월(康熙二十年六月)’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연항대 선사(淵恒代禪師)가 1681년에 실상사를 중창했다고 보는 것이다.

실상사 산내에는 백장암·약수암·서진암 등의 암자가 있는데 산사의 담박하고 옛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로 역사가 가장 오랜 선종사원이다. 현재는 사원의 규모가 크게 줄어 들었지만 옛날에는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수십 동이나 즐비하게 자리잡았던 큰 절이었다. 이 점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당대 최고의 걸작품들을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같은 역사적 의의를 간직한 실상사는 오늘날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올바른 승가상의 확립’과 ‘승풍진작’이라는 목표로 출범한 조계종 비구스님들의 결사 모임인 <선우도량>의 근본도량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승가전문교육기관인 2년 과정의 <화엄학림>을 개설하여 한국불교의 미래를 이끌어갈 승가의 젊은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실상사의 과거와 현재는 새로운 중흥이라는 역사적 마당에서 함께 만나고 있다.

1. 선우도량 결사운동의 근본도량

선우도량은 불기 2534(1990)년 11월 14일에 창립된 승가결사 단체이다. ‘승풍진작’을 통한 ‘올바른 수행자상 확립’을 활동의 목적으로 하

고 있으며,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는 장기·한철·수련·현장결사의 형식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실상사에서는 선우도량의 근본도량으로 장기결사의 서원을 가진 대중들이 사찰운영의 모범을 세우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백장암에는 선방을 개설하여 동안거·하안거 한 철씩을 함께 모여 탁마하는 전통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1년 이래 1년에 두 차례씩 불교계의 현안을 주제로 하여 진행해 온 수련결사는 승가사회에 대중적 공의를 모아내는 토론 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불교계의 여러 문제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실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한 이와같은 활동은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좌선·경학·염불·행정·포교 등 다양한 정진을 하고 있는 각 선우들간의 독특한 연대 형성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실상사는 선우도량의 근본도량으로서 선우도량 결사운동의 위상을 한층 더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 승가전문교육기관 <실상사 화엄학림>

‘새로운 수행자상 확립’을 위한 선우도량의 활동이 1992년말을 기해 승가교육문제로 집중되었다. 승가의 교육 문제는 ‘정법 불교 사상의 확립을 통한 수행과 전법의 토대를 확립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자연스런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선우도량의 승가교육에 관한 문제 의식과 적극적인 실천은 1993년 말 ‘선우도량 승가교육개혁안’으로 나타났다.

<실상사 화엄학림>은 이와 같은 교육 개혁 과정에서 얻은 최초의 성과이기도 하다. 화엄학림은 교육원이 추진하는 승가교육 체계화 작업 중 가장 먼저 정식 인가된 전문교육기관이다.

화엄학림의 교육 기간은 2년이다. 1995년 <화엄학림>이 문을 연 후 해마다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으며 1996년에는 학림의 강당과 학사가 완공되었다. 1997년 5월, 5명의 첫 졸업생 이후 제2회에서 5명, 제3회에서도 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99년 현재는 윗반인 보현당 5명의 스님과 아랫반 문수당 6명 스님이 재학 중에 있다. 또한 화엄학림 후원회인 화엄회가 결성되어 이교육 불사를 돕고 있다.

3. 연구와 수행의 공동체 <화림원>

실상사에서 약수암 가는 오른쪽 방향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아담한 ‘황토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황토집은 기둥·대들보·서까래 등의 나무를 이용하지 않고, 단지 황토흙과 기왓장만으로 지어졌다.

이 흙집이 화엄학림을 졸업하거나 그에 준하는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스님들이 모여 연구와 수행을 겸하는 수행 공동체 화림원이다.

화림원(華林園)의 설립 목적은 경전 연구, 참선 정진, 현실 활동을 통일시킴으로써 수행자의 안목을 밝히고 교단의 발전과 인류 사회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 마련과 실천이다. 이를 위해 여름과 겨울 안거 때에는 참선을 중심으로 경전 연구를 병행하고, 해제 때에는 경전 연구를 중심으로 참선을 병행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1999년 현재 3명의 스님들이 머물면서 『화엄경 현담』 번역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한편 화엄학림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4. 농촌을 살리기 위한 실험, 실상사 농장

사찰의 운영은 사찰이 위치한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사부대중의 수행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찰 운영에 있어서 지역 주민들의 생활 토대와 그에 따른 운영 방식이 나와야 한다. 또한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나 전법(傳法)을 위한 방법 등이 실천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실상사는 사부대중 공동체였던 사찰의 오랜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1996년에 3만평 가량의 ‘실상사 농장’을 만들었다. 이와같은 사찰의 토지 활용은 사찰과 지역 사회의 공존 및 균형과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좋은 구실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생명 위기에 대한 생명 살

림의 불사이며 나아가 전체 국민들이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을 회복한다는 점에서도 깊은 의미가 있다.

실상사 농장의 목표는 네 가지이다. 첫 번째는 연기법의 세계관에 따라 삶의 철학을 세우고 지역에 맞는 환경 친화적 농업을 통한 건강한 먹거리 생산이다. 둘째는 유기농이나 자연 농법을 연구 계발하여 그 기술을 지역 사회에 보급하는 교육 기관의 운영이다. 세 번째는 생산한 먹거리 나누기를 통해 도시와 농촌을 이어주는 도농(都農) 공동체 건설이다. 네 번째는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사부대중 공동체 만들기이다.

시작 단계에 있는 실상사 농장은 1999년 현재 <실상사 귀농전문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으며, 도시 사찰에 매장을 열어 도농 직거래를 행하고 있다.

이처럼 실상사 농장의 지향하는 목표가 하나하나 실현될 때 그것은 지역 사찰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모범이 될 것이다. 아울러 한국불교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 모색과 함께 현대 사회의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다.

5. 생태적 가치와 자립적 삶을 위한 <실상사 귀농전문학교>

<실상사 귀농전문학교>는 1998년 9월 ‘생태적 가치와 자립적 삶’을 건학 이념으로 내세운 귀농전문 교육기관이다. 1998년에는 제1기 졸업생 13명을 배출하였고, 1999년 5월 현재 제2기 17명이 재학하고 있다.

귀농전문학교는 흙과 사람을 살리는 환경 농업 교육, 자녀 교육, 농촌 문화 교육 등 공동체적 삶에 기반한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자연과 사람,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사는 삶의 터를 만들기 위한 사업 중의 하나로써,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한 주체적 깨달음의 철학을 제공하는 구실도 한다.

40여 명의 전문적인 강사진을 중심으로 탄탄한 이론과 실기 교육을 겸비하고 있는 실상사 귀농전문학교는 매년 봄과 가을에 각 3개월씩 개설하고 있다. 향후 안정적 학교 운영을 위하여 환경 친화적인 학사(學舍)를 건립할 예정이다. 학사가 건립되면 귀농인과 도시인들에게 자연과 함께 하는 생명 살림의 교육은 물론,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 환경 농법의 전문적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농촌 문화 등이 활성화되어 우리 지역에서 필요한 사회교육센터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6. 실상사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

실상사를 발굴하는 목적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가람 구조의 원형을 밝혀 오늘에 되살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구산선문 최초 가람인 실상사 발굴의 역사적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실상사 발굴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1991년에 실시한 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보광전 복원 불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 이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1996년 12월부터 5년 계획으로 실상사 발굴을 진행 중이다. 현재 진행 중인 발굴은 실상사의 가람 구조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변천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1996년 12월부터 실시하여 1998년 12월 현재까지 발굴 조사한 구역은 보광전 서북편, 약사전 동북편, 그리고 목탑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러한 발굴 조사 결과 건물지 10여 개가 확인되었고,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 조선시대의 건물지로 추정된다. 그러나 몇몇 건물지는 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는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상당히 이른 시기의 건물지로 생각되기도 한다.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상사의 가람 배치는 시기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즉 지금 남아있는 통일신라 시기의 두 3층석탑을 중심으로 하는 가람 배치와, 또 하나는 추정 목탑지를 중심으로 한 시기의 가람배치이다. 여기서 3층석탑과 목탑의 조성 시기를 달리 보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할 만한 확실한 유구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되는 발굴 조사가 끝나면 구산선문 사찰의 구조를 밝힐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구산선문 최초 도량인 실상사 창건 당시의 가람 구조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실상사 복원을 통해 우리나라 선종 문화의 뿌리를 밝혀내고,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