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씨 5권

아이들의 등대지기

문교정(사회복지사)

산과 들에 녹음이 짙어가는 5월 중순의 일이다. 나는 어김없이 생활보호대상자 명단을 근거로 도움이 필요한 소년소녀가장세대가정을 방문하여 생활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소년소녀가장들을 찾기 위해 동사무소 사회담당자와 부지런히 전화를 하던 중 아버지와 딸 2명, 아들 1명이 살고 있는 가정이 있다고 하여 방문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서울 강동구 성내동 어느 허름한 맨션아파트. 지하 방 1칸, 외부에는 수십세대가 함께 사용하는 공동화장실 2칸이 있는 곳이었다. 이 날 아이들과 아버지 그 누구도 만나보지 못하고 돌아 오는 길에 동사무소를 방문하여 사정을 이야기 하고 그 가정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담당 공무원은 아이들의 사정을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고 또 그 아이들을 돕고 있는 사람이 있다며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나는 아이들을 돕고 있는 분과 연락을 하여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은 보통 체격에 마른 편이었으며,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그 분은 도로변에서 내 손을 잡고는 다짜고짜 “ 아이들이 불쌍하니 꼭 도와달라”며, 아이들 가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 주었는데 그 분의 간곡한 부탁은 나를 무척 당황스럽게 하였다.
이 날 이후 나는 전화상담과 방문을 통하여 그 분과 잦은 접촉을 갖게 되었으며, 생활능력이 없고, 알콜 중독으로 인한 간경화로 입·퇴원을 되풀이하는 아버지와 아이들의 생활고를 해결하고 자립을 돕기 위해 많은 부분에서 그 분과 함께 노력하였다.
그 분은 황재모씨로 밤에 유흥업소에서 악사를 하는 48세의 중년이다. 황선생님은 이 가정을 위하여 아침에는 아이들 가정에서 지내고, 낮에는 지역주민들을 만나 아이들을 도울 후원자들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아이들 집의 월세와 공공요금을 해결해 주고 있었으며, 아이들 아버지에게 알콜을 중단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이들 아버지가 끝내 간경화로 사망하자 빈소를 지켜 장례를 치루어줬고, 장기결석으로 학업을 중단한 여자 아이 2명을 복학시켜 주었으며, 뜻있는 주민들에게 후원금을 받아 아이들에게 새 거처를 마련해주었던 것도 황선생님이었다.
그 분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 어려운 가정을 찾아내어 열심히 그 가정을 돌보아 주고 있었다. 더욱 나를 감동시킨 것은 아이들이 가출을 하거나, 아이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더라도 한결같이 매일 그 가정을 찾아가 안부를 확인하고 도와 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헌신 때문인지 아이들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아이들의 장래를 부탁한 사람도 이 분이었다고 한다. 한 가정의 꺼진 불씨를 다시 피워 가는 이 분의 무조건적인 아이사랑과 따뜻한 가슴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이 분을 보며, 직업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선한 일들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하는지도 모른다. 작은 실개천이 모여서 큰 강과 바다를 이루듯이 ‘나 하나의 힘이 무슨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보다는 나의 작은 힘이 모여서 큰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더 많은 분들이 아이들의 등대지기가 되었으면 한다.

토요일 오후. 창밖에는 오랫만에 비가 오고 있다. 언론에 연일 국회의원과 공공기관의 장의 추태가 보도되더니 오늘은 어느 시민단체의 유명한(?)분의 성추행 사건이 보도되었다.
혼탁한 세상에 권력도 명예도 부도 따르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는 푸른 「거목」과 같은 그 분과 따뜻한 차 한잔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