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씨들의 글

11월에도 더운 게 기상이변의 징후겠거니 했는데,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는가 보다. 영하의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이 추위에도 인현동 라이프 호프 화재의 희생자 56명의 인천 청소년은 아직 체육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사건 이후, 정부는 청소년 시설의 확충을 약속했지만 시설이라는 게 어디 한 순간 생겨지는 것이랴. 젊음은 발산해야 하는 것, 춤과 노래로 발산하라는 듯 연말 연시를 앞둔 방송매체는 아슬아슬하고 현란한 몸짓을 여과없이 보여주는데, 이 긴 밤, 이 땅의 청소년은 어디에서 젊음을 발산하려 기웃거려야 할까. 저렴하다는 콜라텍도 만원은 있어야 한다. 시간당 천원인 인터넷 게임방에 틀어박혀 아까운 시간을 또 죽여야 하나.

젊음의 발산이 비단 춤과 노래 뿐은 아니겠으나 음악 미술 연극 문학, 친구들과 땀 흘려 뛰어 놀 공간도, 하다못해 발명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앉을 공간도 없다. 대학입시가 인생을 좌우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실패자를 양산하는 현재와 같은 입시위주의 제도교육보다 낙오자 없는 젊음을 위한 공간은 어디일까. 인현동 참사가 있기 얼마 전 이 땅의 청소년들을 그들을 위한 광장을 만들어달라고 이야기했다는데 책임 있는 어른 중 누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지난 11월 중순경 PC통신 게시판은 때아닌 골프장 토론이 뜨거웠다. 공적자금을 무려 1,360억 원을 투입하여 골프장을 건설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를 성토하는 글이었다. IMF 경제로 아직 많은 시민들의 고통이 가라앉지 않았고, 갈 곳이 없던 56명의 청소년 희생자가 아직 구천을 헤매는 이때 이 무슨 해괴한 소린가, 시민들은 정부의 처사에 실망을 넘어 분노하고 있었다.

박세리·김미현이 미국에서 골프를 잘 해준 것은 기특한 노릇이지, 그게 이 땅을 농약과 위화감으로 크게 오염시키고 오랜 생태계를 교란할 골프장의 명목이 되는 걸까. 그들은 번 돈의 일부라도 이 땅의 청소년들의 놀이공간을 위해 쾌척하기라도 했을까. 1,360억 원이면 노벨상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교육 문화 여건, 무의탁 노인, 결식 아동이 늘어나는 복지 후진국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시민의 세금을 일부 부유층을 위한 놀이공간으로 오염시켜야 할까. 청소년의 희생을 짓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부는 골프장 계획을 마땅히 취소해야 한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서 이 땅의 청소년을 만나도록 권하고 싶다. 청소년 정책은 청소년과 함께할 때 빛나는 게 아니겠는가. (인천광장신문 1999.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