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고 싶은 글 1

때는 1961년 10월 중순경 어느날, 서울 와룡동에 있던 華山書林에서 주인 故李聖儀씨를 만났다. 李씨는 평소에 나에게 책을 팔아 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날은 전례없이 친절한 응대를 하며 책뭉치를 끌르기 시작한다. 나는 이상하기도 하고 한편 호기심에 사로잡혀 지켜보고 있었다. 책은 우리 국어학계에서도 유일본으로 널리 알려진 『月印釋譜』 권 13-14와, 전권의 3분의 1 정도의 후부만 남은 嘉靖刊『月印釋譜』 권 23이었다. 李씨는 이 책을 처분해 주기를 나에게 부탁하며 값은 3책에 물경 6백만환을 호가하였다. 책이 팔리고 안팔리는 것은 뒤로 돌리고 나는 처음 보는 책이라 우선 입수해 놓고 보자는 욕심에서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 이러저러한 귀중한 책이 입수되었으니 勿失好機하고 眼福을 누리라는 전화를 제 1차로 정음사 催暎海사장에게 걸었다. 그날 저녁 5시경에 종로 양지다방 2층에서 최사장과 경희대학교의 金基雄씨, 시인 趙炳華씨와 그리고 나 네사람이 대좌하며 커피를 마시면서 조심스럽게 배관(拜觀)하였다. 나는 이실직고로 이 책은 화산서림 주인 李씨의 책인대 6백만환을 호가하니 용기를 한번 내라고 권고하였다. 모두를 혀를 차며 깜짝 놀란다. 최사장은 ‘좋기는 좋은데’를 연발하다가 2백만환을 당장 낼 터이니 1백 50만환은 책값으로 李씨에게 건네고 50만환은 나의 수고료로 쓰기로 하고 교섭을 해보라는 것이다. 나는 李씨의 딱장대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라 그 값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고 응하지를 않았다. 최사장은 차비까지 내놓으며 밑져야 본전이니 가부간에 李씨에게 가서 절충해 보기를 굳이 간청한다.

나는 억지춘향으로 마지못하여 李씨를 찾아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예상대로 李씨는 펄쩍 뛰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나는 최후 수단으로 나의 수고료 50만환까지 넣어서 2백만환을 다 준다고 하였으나 막무가내다. 흥정은 틀어지고 그날밤 나로서는 파격적으로 명동의 밤 뒷거리 구경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 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도사관에서도 아무리 귀중본일지라도 그와 같이 고가의 책을 선뜻 산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 후 얼마 동안 이리저리 살만한 사람을 찾아 주선하다가 여의치 못하여 책을 반환해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李씨는 나를 만난 자리에서 崔사장에게 얼마만 더 내고 사도록 재교섭을 해보라는 것이다. 파는 사람은 더 받으려 들고 사는 사람은 덜 내기 위하여 서로가 켕기니 중간역할을 하는 사람은 진땀만 빼고 성사는 좀처럼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친걸음이라 崔사장에게 李씨의 부탁말을 전하니 崔사장 왈, 그 때는 엄친의 생신 기념으로 사드릴 예정이었으나 이미 그날도 지났고 돈도 다 써버렸으니 더는 커녕 덜해준대도 못사겠다고 보기좋게 차버린다. 그후 20여일이 지났을까 국어학자 고 유창순교수가 그 책을 가지고 종로 양지다방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길로 유교수와 연세대학 도서관으로 직행, 그때 도서관장 閔泳珪박사와 만나 3백 30만환에 팔고 사기로 전격적인 결말을 보았다.

그런데 『月印釋譜』 권 13·14에 얽힌 비화의 초점은 지금부터 털어놓는 얘기에 있다. 이 책의 처음 소장자는 일본인 한국어학자 小倉進平이었다. 그러므로 그 책 첫머리에 소창장서<小倉藏書>라는 장서인까지 찍혀있다. 小倉은 일찍이 조선어학연구에 뜻을 두고 1911년에 來朝하여 그때 경성제국대학에 있으면서 조선어학에 관계되는 자료와 문헌등을 그때의 조선총독 齋藤實의 후원하에 종횡무진으로 수집을 하였는데 천하유일의 『月印釋譜』卷13-14도 그때 小倉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小倉은 그의 장서를 몽땅 꾸려가지고 동경제국대학으로 전직하였기 때문에 월인석보도 小倉과 함께 영원히 고국을 등진 것으로 생각하고 한국학자들은 애석해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곡할 일이지 천만 뜻밖에 이 책이 『訓民正音通史』의 저자 故方鍾鉉씨의 一蓑文庫에 건재하다는 뉴스가 퍼졌다. 지금 동국대학교 교수인 杜詩硏究家李丙疇씨가 달려가 책구경을 하고 ‘선생님, 이거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方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이유는 묻지 말고 있는 줄만 알라고 하더란다.

그 후에 6.25동란에 이어 1.4 후퇴로 서울시민들은 남부여대하고 釜山으로 내려가 피난생활들을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方교수는 피난생활 중 釜山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一蓑文庫는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그 장서의 정리를 맡은 사람이 바로 화산서림 故李씨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일본인 『月印釋譜』는 小倉에게서 方鍾鉉교수에게로, 또 다시 李씨에게로 넘어와 나의 손을 거쳐 종착지 연세대 도서관으로 입적하게 되었다.

나는 李씨의 부탁으로 입수하였지만 小倉과 方교수와 李씨 사이에서 『月印釋譜』가 거래된 확실한 연유는 이 세 사람이 모두 고인이 되었으므로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게 되는 것이다. 小倉이 方교수에게 讓渡하거나 귀중본을 빌려주고 잊었을 리도 만무하다. 그리고 方교수댁에서도 李씨에게 그 책을 양도했을 리가 만무하며, 또 책정리를 한 수고의 대가로도 책을 주었을 것 같지도 않다. 생각할수록 야릇한 흑막이 있는 것만 같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이 외침과 전란을 겪는 동안에 음으로 양으로 무수히 고국을 떠나 이역으로 흘러갔는데 외국에 내왕하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내 맘대로 쓸 수가 없고, 또 배 주고 뱃속 빌어먹는다는 속담과 같이 그들의 수중에 있는 우리의 귀중典籍들을 어쩌다 한 번 열람하려면 때에 따라서는 힘이 들고 아니꼬운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月印釋譜』도 자칫하였더라면 영영 불귀의 객이 될 뻔 하였으니 아슬아슬한 감을 금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