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둥산 억새잔치를 벌이는 정선군 남면 사람들 이야기

무릇 이 땅에 살던 누군들 주어진 땅과 현실을 ‘무릉도원’의 그것으로 꿈꾸지 않았겠는가만, 유독 이 나라의 한 지역만은 그런 마음의 꿈을 사람이 달에 가고, <풀꽃세상>과 네팔의 풀씨 사이에 눈깜짝할 새에 인터넷 메일이 오고가는 시대에도, 현실인 듯 호칭하고, 그런 호칭을 즐기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강원도 정선군 남면 사람들이 그들이다.
가을이면 이 땅 온 산하를 희게 물들이며,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바로 그 억새를 대상으로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이 남면 사람들이다.
억새잔치를 벌이는 곳은 남면 말고도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도 있지만, 우리 <풀꽃세상>이 3회 풀꽃상을 <가을 억새>에게 드리면서 북제주보다 먼저 인연을 맺게 된 곳은 정선군 남면이었다.

(사진설명: 억새풀잔치는 남면의 가장 큰 축제다. 오색풍선에 억새가 멀미를 한다.)

남면의 ‘민둥산억새풀잔치’가 처음 벌어진 때는 1996년. 지난 해에는 이 나라를 덮친 IMF 때문에 ‘시국이 이러할진대 무슨 놈의 풀잔치는 풀잔치냐’는 내부의 소리 때문에 스스로 움추러들어, 한 해를 걸렀으니 올해(1999)로 세번째 잔치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난 환란과 관계없이 민둥산의 억새는 그 전해 가을에 그랬듯이 환란의 해에도 여전히 미어지게 그 산에 피어나고, 스러지도록 바람에 흔들렸고, 노을에 젖었고, 달빛에 고개 숙였고, 다시 떠오르는 해를 다소곳이 받아들이며, 억새들 스스로 사람은 참석시키지 않고 세번째 잔치를 벌였던 게다. 설사 억새를 둘러싼 ‘사람들의 잔치’는 못 열었지만, 남면 사람들은 그들 살림살이 한쪽켠에 형제처럼 버티고 있는 그 산의 억새가 그러했으므로, 환란으로 열지 못한 잔치에 대한 쑥스러움을 보상이라도 하듯, 금년 잔치를 ‘제4회 민둥산억새잔치’라 이름붙이고야 말았다.
우리 <풀꽃세상>이 남면 사람들에게 감동한 부분이 그런 대목이었다.

강원도 정선은 널리 알려져 있듯 아라리의 고장이다. 그러나 그곳 남면 민둥산이 전국의 소문난 억새군락지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민둥산억새잔치를 벌이는 남면은 태백산의 연맥(連脈)인 지억산의 능선으로, 북으로는 동면, 정선읍과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으며, 동으로는 사북읍, 남으로는 신동읍, 서쪽으로는 가수리와 면계를 형성하고 있다. 군소재지가 있는 정선읍내로부터는 동남쪽으로 26킬로 지점에 있다. 고려 충렬왕 17년 군 이름이었던 주진(朱陣)을 ‘도원(桃源)’으로 개칭할 때, 풀꽃세상에서 드린 상패가 서 있는 무릉리 증산에 읍기(邑基)가 있다 하여 ‘무릉도원’이라 칭했다 한다. 조선 광무10년에 남상면 증산과 남하면 하선평을 통합하여 남면이라 칭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설명: 민둥산 입구 무릉도원 공원의 풀꽃상 상패)

남면의 89%가 임야이며, 평균 표고 400미터 이상의 고지대로 준고냉지 전작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8년 현재 1,612세대, 4,854명이 거주하며, 민둥산억새 군락지 말고도 두위봉 철쭉군락지, 거칠현동 정선아라리의 발상지, 삼내 약수 등의 자원을 거느린 고원관광지로서의 개발이 마을 살림살이 하는 사람들의 꿈이다.
지자체 시대 이후, 자신들의 삶터가 지니고 있는 가치를 둘러보면서 쉽게 관광자원으로만 생각한 것은 비단 남면 사람들만은 아닐 것이다. 우후죽순처럼 내용없는 ‘축제’가 범람하는 것도 자연의 사용가치적 접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단지 그곳이 ‘산’이라는 것말고 특별한 자원이 없는 남면 사람들이 억새를 사람들을 위한 자원가치로 재발견한 것을 누가 탓할 수 있으랴. 그렇게 쉽게 접근했지만, 잔치를 벌여가면서 억새 한 포기의 가치가 단지 사람만을 위한 가치에 있지 않음을 느낀다면, 그것이 매년 잔치를 벌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이 될 것이다.

(그림설명: <풀꽃세상>은 '축제'라는 말보다 '잔치'라는 말을 조심스레 권했고, 남면 사람들은 금년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받아들였다.)

남면 민둥산억새잔치는 1996년 1회 때부터 억새가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10월 중순께, 이틀에 걸쳐 거민적(擧民的)으로 진행된다. 1997년 2회 억새잔치 때부터는 억새잔치를 통해 사람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도 얻으려고 ‘면민의 날 행사’도 함께 곁들이기 시작했다. 갖가지 행사를 통해 면민들이 서로 얼굴 맞대고 정을 나누면서 서로 함께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래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부드럽게 확인하는 시간을 민둥산 억새가 환하게 피었을 때 같이 가지기 시작했던 게다. 산에는 억새 만발하고, 마을에서는 줄다리기와 외다리 씨름과 팔씨름 대회가 벌어지는 것이다.

(사진설명: 무릉3리의 민둥산표지판(위)과 밭구덕의 등산로안내도(아래))

행사가 거듭될수록 수십만평 민둥산억새밭의 가치가 조금씩 알려져 잔치 기간에는 증산역에서 민둥산 정상까지 9킬로 등산로(4시간 소요)가 발디딜 틈 없는 인파로 미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그들 관광객들이 가을 억새만 즐기고,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쓰레기만 남아, 남면 사람들은 쓰레기 치우는 일만 도맡곤 했었단다. 그러나 순후한 남면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이 민둥산의 억새를 보러 몰려드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한다. 고장의 억새자랑만으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정작 관광객들은 돈 한 푼 안 떨구고, 쓰레기만 남기고 가도, 그들은 자신들 고장의 엄청난 억새밭이 자랑스러운 것이다.
남은 일은 내부로는 면민의 통합과 외부로는 억새자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친환경적으로 전개되는가, 그 문제일 것이다.

광활한 수십만평의 억새밭이 펼쳐지는 민둥산 일대를 이곳 사람들은 ‘발구덕(發九德)’이라 부른다. 없던 한자를 넣어 그럴 듯한 억지 지명이 되었지만, 본래는 크고 작은 분지로 된 구덩이가 여덟 개 있음에 연유한 ‘여덟 구뎅이’에서 생긴 지명이다. 300여년 전, 평해 황씨가 이주하여 움막을 짓고 개척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지질학자들은 민둥산 아래 지층이 거대한 공동(空洞)으로서 아직 그 공동의 규모와 끝을 알 수 없다고 추측하고 있다. 여덟 구뎅이는 오랜 세월에 걸친 지각변동으로 일어난 거대한 규모의 지반침하의 흔적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남면뿐 아니라 석회암 지대인 정선군 평창군 영월군 일대 모두에 해당되는 지질학적 특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남면 사람들은 그곳 민둥산이 지층이 얇아서 뿌리가 깊지 않은 억새와 같은 다년생 초본식물밖에 살 수 없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언제부터 민둥산에 그토록 광활하고 엄청난 억새밭이 형성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래서 거기 억새밭을 보고 자란 남면 사람들의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말한다. “언제적부터 민둥산이 억새천지가 되었냐고요? 태고 이래부터죠,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