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용의 쓸개를 보았는가




풀잎 끝에 흰 이슬 맺힌다는 백로(白露)가 지났건만
아직도 한낮의 햇살은 따갑습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 하니 비 한 줄기 긋고 지나면
세상의 표정은 한결 깊어져서 바람결에 가을 냄새가 묻어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깊어지고 쓸쓸해지는 계절,
여름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의 낯빛이 하루가 다르게 까칠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바람벽이 튼실치 못한 내 안에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쓸쓸한 기운이 스미는 것을 느낍니다.
빨간 혼인색을 띠고 맴을 도는 고추잠자리와  한층 깊어진 물빛과 
아침 저녁으로 옷섶을 헤치는 바람의 서늘한 손길이 나의 쓸쓸병을 도지게 하고
아침마다 마당 위로 떨어져 내리는 푸른 감들이 위로만 치솟던 나의 생각들을
낮은 곳으로  내려 놓게 합니다.

가을엔 쓸쓸한 것들이 아름답습니다.
강화에 홀로 사는 함민복 시인의 '찬밥'이란 시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도 바로 이즈음입니다.


가을이 되면 찬밥은 쓸쓸하다
찬밥을 먹는 사람도 쓸쓸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찬밥이었다
사랑하는 이여
낙엽이 지는 날 그대의 밥상 위에
나는 김 나는 뜨끈한 국밥이 되고 싶다

                 -함민복의 [찬밥] 전문 -



가을꽃의 대표선수는 국화이지만 국화향 그윽한 숲을 거닐다 보면 청보랏빛의 용담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늦여름부터 가을이 끝나가도록 꽃을 피우는 용담은 가을숲의 귀족입니다.  작은 종을 거꾸로 젖혀 놓은 듯한 꽃모양도 예쁘지만 그 청보라의 꽃빛은 누구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아직 용담꽃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처음 야생화에 마음을 뺏겨 시간만 나면 들로 산으로 내닫던 시절,
가을이 깊은 고향의 뒷산에서 저 꽃을 만났습니다.
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이름은 알 수 없어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한 가지 꺾어 들고 산을 내려와 어머니께 보여 드렸을 때 어머니는 한약재로 쓰이는  용담뿌리를 캐던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핍한 살림에 보태려고 그 뿌리를 찾아 산을 해매던 이야기를......

내겐 그저 곱기만 한 꽃이지만 어머니에겐 삶의 진액이 묻어나는
무연히 바라볼 수 없는 사연 많은 꽃인 셈입니다.
같은 꽃이라도 그 꽃이 삶 속으로 들어와 앉으면 지워지지 않는 화인(花印)이 되기도 합니다. 

용담(龍膽)은 말 그대로 용의 쓸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 곱디 고운 꽃이 용담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한약재로 쓰이는 뿌리가 세상에서 제일로 쓰다는 곰쓸개보다 더 쓰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얼마나 쓰기에 상상 속의 용까지 동원하여 이름을 붙였을까 싶어 한 번 그 뿌리를 입에 대고픈 호기심도 없진 않았지만 불행히도(?)아직 그 맛을 본 적은 없습니다.


가을이 깊어 삶이 쓸쓸해질 때 산에 올라 용담꽃을 만나 보시기를...
그 꽃을 보고도 쓸쓸병이 낫지 않으면 그 뿌리를 한 번 씹어 보시기를...
아름다운 꽃 한송이 지상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  세상의 쓰디 쓴 맛을 지녀야만 했던 뿌리의 수고를 생각해 보시기를...

서비스 팁 :

< 금강산 비로봉에서만 발견된다는 비로용담>